좋은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인상깊은 장면이 떠오를 수 있고, 드라마의 어떤 에피소드에서 내가 느낀 슬픈 감정이 기억 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이야기 속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기억에 남고 어떤 것은 그저 스쳐지나갈까? 이야기를 보고 들을 때 우리의 기억이 작동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지심리학에서 기억을 좀 더 세분한다.
- 감각기억 : 시각, 청각 같은 감각 자극을 아주 짧은 시간동안 유지하는 것이다.
- 단기기억: 짧은 기간 동안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기억이다. 예를 들면, 온라인으로 이체를 하려고 할때 잠깐 계좌번호를 외우는 것
- 작업기억: 이해하고 추론하는 등의 복잡한 과제를 수행할때 필요한 정보들을 유지하는 기억이다. 머리 속으로 문장을 이해할 때를 생각해보면 된다.
- 장기기억: 오랜 기간 저장하는 기억으로 의미기억, 일화기억, 절차기억 등이 있다.
연극을 한편 보고 있다고 하면,
- 일단 무대에서 펼쳐지는 시각, 청각 자극을 아주 짧은 시간동안 유지된 감각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정보들, 그러니까 대사나 시각적 요소들은 단기기억에 저장된다.
- 이렇게 단기기억에 남았는 것들을 바탕으로 연극의 배경이 되는 사실들을 알게 되고(작업기억)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를 파악하거나 주인공을 둘러싼 작품 속 세계를 재구성하게 된다.
- 그리고 현재 장면을 이전 장면과 연결하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연극 외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기억을 바탕으로 연극의 내용을 해석한다. (작업기억)
- 연극이 끝나고, 인상깊은 장면이나 대사, 대략의 줄거리 등은 장기기억에 저장된다.
이런 경우가 있다. “철수가 사생아였어? 아~ 그래서 철수가 그랬었던거구나~”
“영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렇게 얘기했잖아, 그 대사 못들었어?”
그 대사를 못들었을까? 들었다. 청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배우의 대사는 감각기억으로 잠시 저장되었다가 단기기억으로 저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업기억 단계 즈음에서 의미있는 정보로 캐치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대부분의 단기기억이나 작업기억들은 저장되지 않고 사라지고 또 새로운 기억들이 저장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의미를 재구성하고 장기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연극을 보는 내내 필요한, 중요한 정보가 사라져버린다면?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퍼즐의 한조각때문에 보는 내내 작업기억들을 가지고 이야기 속 세계를 재구성하는데 실패한다. 그렇게 흘러 결말에 이르러 배우의 격정적인 연기에도 아무런 감흥을 갖을 수 없게 된다.
지난번 글에서 말했듯이 “감정은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야기의 중요한 장면들에서 감동을 받으려면 이야기 속 세계와 인물을 우선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철수가 길고양이를 괴롭히는 영희에게 “길에서 태어났다고 괴롭힘을 받아야 하는건 아니야!”라며 과하게 화내는 장면이 있다고 한자. 철수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모르면 철수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이야기는 이러한 것들이 쌓여 결말을 만든다. 사라진 퍼즐이 많아지면 이야기 속 퍼즐 조각은 연쇄적으로 계속 사라지며 무너진다. 모든 이야기 예술이 그렇다. 특히나 연극, 영화, 드라마 같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감상하는 매체는 기억이라는 요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가나 감독들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이야기에서 기억해야할 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일이다. 무대와 영상에 올려지는 것들 중에 작업기억으로 에 올려좋아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고, 관객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과도 연결시킬 수 있게 되면서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에 저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을 통제해야 하는 지휘자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다. 무대연출이나 영상문법들에 대한 방법론들을 기억의 관점에서 풀어보면, 기억해야할 것들을 기억하게 하고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은 기억하지 않게 해서 이야기의 세계와 인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여러가지 경험적 방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야기들 중에 기억해야할 중요한 퍼즐 조각을 놓지고 지나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아, 그거 철수가 창고로 들어오는 장면에 있는데, 제대로 안보셨네요.”라는 항변은 할 말이 아니다. 인물과 세계가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에서 철학적 의미니 사회적 맥락이니 미학적 성취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