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어느날 나비가 왔다. 누런 색의 흔한 길고양이였다. 꾀재재한 몰골의 녀석이 마당에서 기웃거렸다. 불쌍해 보이기도 했고 친해지고도 싶었다. 마른 멸치를 던져주니 잘먹었다. 고양이 기르는 친구에게 물어 사료를 샀다. 아침저녁으로 사료를 주기 시작했고 그 녀석에게 ‘나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나비가 마당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사료를 한 컵 물 한 그릇 담아주었다. 밥을 먹으면 나비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조금씩 마당에 오래 있으면서 뒹굴거리기도 했다. 문을 열어도 멀리 도망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손으로 먹을 걸 줘도 날카로운 손톱을 날렸고 만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서운해하지 않기도 했다.
내가 사료를 주지만 넌 나의 고양이가 아니니까 . 너의 삶이 있는거지. 언제든 내가 사료를 못주는 상황이되던 너가 떠나던 상관없는거야. 그래, 우린 쿨한 관계니까.
연애관계가 그렇듯이 쿨한 건 없었다. 사료만 먹고 낼름 가버리는 나비가 얄미웠다. 만지고도 싶었다. 어느 길고양이는 고맙다는 표시로 마당에 떡하니 쥐를 잡아두었더라는데 넌 뭐 귀여운 척이라도 해야되는거 아니냐고도 생각했다. 마당에 좀 오래있게 하려고 사료를 일부러 한참 있다가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며칠 나비가 보이지 않자 걱정스러워 했고 절룩거리며 상처입은 모습으로 나타난 나비가 반갑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만져주지 못하니 상처를 치료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던 9월 어느 저녁, 나비가 힘겨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당 구석에서 숨만 겨우 헐떡 거리고 있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보였다. 위급한 상태인 것 같았다. 고양이 기르는 친구에게 전화로 물어보고 하다가 안되겠다 싶었다. 박스에 나비를 안아 넣었다. 그 때가 나비를 처음 만진 순간이다.
동물병원으로 뛰어갔다. 기력이 없었지만 박스 안에서 꿈틀거리며 조금 발버둥쳤다. 박스를 들고 뛰어가던 가슴조린던 그때 느낌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박스를 내려놓고 살펴보니 나비는 죽어있었다. 그렇게 나비는 갔다.
나비의 마지막을 생각해본다. 지붕에서 창고 지붕으로, 그다음 몇개의 계단을 내려와야 마당이다.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어하던 녀석이 거긴 어떻게 내려왔을까? 아마도 마지막 힘으로 우리 집 마당을 찾아온 것이리라. 그 곳이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해야할 장소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나에게 마지막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여지껏 나비가 이곳 혹은 나를 삶의 마지막에 찾을 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린 서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고 나비도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러나 세상에 모든 생명들이 갖는 관계는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인터넷의 길고양이 카페에 함부로 사료를 줄 생각을 하지말라는 글을 보았다. 사료를 주기 시작하면 그 길고양이는 그것에 의지하게 되고 또 사람에 대한 경계도 약해져서 다른 곳에서 살아가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길고양이와의 관계 맺기 조차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구나. 관계를 시작하는 건 어찌 쉬운 것 같기도 하지만 신중함이 있어야 하고 그 관계속에는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구나.
세상에 쿨한 관계는 없다.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본인이 원했던 원하지 않던 상관없이 만남은 변화를 동반하게 되어있다. 그 변화를 감지하면서 다시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혹은 상대는 알 수 없는 변화들도 많다. 나비가 그랬다. 길고양이들이 ‘야옹’소리를 내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걸 나비가 죽고 나서야 알았다. 나비는 지난 여름에서야 겨우 한두번 나를 보고 ‘야옹’소리를 냈지만 난 그게 나비에게 얼마나 큰 변화였는지 알지 못했다. 미안한 생각 뿐이다.
여러모로 삶에 대해, 관계맺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지금도 나비 생각을 하면서 코끝이 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