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선의 삶]이 생각나는 하루다.
검사 놈들이나 조국 장관이나 각자가 궁리한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생을 끝내기로 한 설리도.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더 나아지기 위해 기꺼이 더 나빠지는 사람은 없다.
타인이 보기에는 바보같아도 각자의 삶을 헤쳐가는 그 각자들에게는 그나마 최선이다.
언제나 새로운 상황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타인들. 삶에 능숙하지 않기에 선택은 언제나 차선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더 나아지기로 했던 의지가 그나마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하고 각자를 의미있게 하므로 우리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 의지의 선악이나 옳고 그름은 또 다시 혼돈의 영역에 두고, 그래서 그 행위자가 악당이냐 아니냐는 일단 덮어두고서라도 말이다.
소설 속 강이가 시간이 지나 마주했을 오늘의 세상도 10대의 강이가 마주한 학교나 학교 밖 세상과 다르지 않다.
설리에 대한 악플이나 조국에 대한 집단 린치의 폭력성은 강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만큼이나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강이는 “나한테 왜 그랬어?”라는 질문을 품고 살 것이다. 가슴 속에 서늘한 칼 한자루 들여놓고 살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게 영혼없는 악당들 보다는 비루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