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길은 많다. 대개는 네비의 안내대로 서울에서 제일 빠르게 갈수 있는 고속도로로 먼저 올라가서 최고 속력으로 달린 후 빠져나와 부산의 최종 도착지로 가는 경로다. 그러나 지도앱으로 보면 수만가지 경로를 짤 수 있을 정도로 길은 많다.
지난번에 부산 갈일이 있어 국도를 타고 부산까지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간에 들러야 하는 곳도 있어서 경로를 찾아보니 31번 국도가 기장까지 간다. 31번 국도는 양구에서 시작하는데 시작점까지 거슬러가긴 그렇고 해서, 제천에서 빠져서 영월 즈음에서 31번 국도로 들어섰다. 국도로 들어서면 내비는 필요없다. 도로 표지판에 31번을 보고 쭉 따라가면 된다. 네비가 없던 시절엔 아마 이런 식으로 다녔을 것 같다.
국도를 달리다보면 최대한 느리게 가고 싶을 정도로 주변 경치가 끝내주는 곳이 많다. 특히나 영월, 정선, 태백, 봉화, 청송 이런 태백 산맥 따라 있는 도시들을 지나는 구간은 드라이브 코스로 어디든 추천할만하다. 눈 온 다음날은 어디든 황홀한 풍광을 보여준다.
국도는 고속도로처럼 직선이 아니고 꾸불꾸불하다. 게다가 예전에 다니던 비포장 길들을 따라 도로를 만들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과거의 기술적인 한계도 있을테고. 그래서 산촌 구간의 국도는 경치가 좋다. 도로 옆은 강이 흐르고 절벽이 있다. 그 옆으로는 빽빽한 숲이 펼쳐져 있다. 아주 오래 전 과거 시험보러 다시던 시절부터 그나마 다니기 편했던 강 옆으로 길이 났을테고 그래도 산으로 막히면 그나마 넘기 수월한 ‘재’들로 길이 났다.
국도로 다니다 보면 뜻밖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어떤 구간은 앞에서 오는 차도 없을 정도라 기막힌 풍광과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가끔 바쁘지 않으면 국도를 이용해보려고 한다. 국도 마다 번호가 붙어있어서 하나하나 도장깨기 하듯 다니는 재미도 있다. 어차피 부산이 도착지라면 국도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기름값도 더 들 수도 있다. 번듯한 휴게소도 없으니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뜻밖의 발견이 주는 도파민 폭주의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오늘 부산을 가기 위해 3번 국도를 달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3번 국도로 쭉 달리다가 진주내동교차로에서 2번국도 방향으로 가면 2번국도의 종점이 부산 남포역에 닿는다. 참 심플하다. 네비도 필요없다. 고속도록 보다는 운전이 느긋하다. 주변 경치도 좋다. 기름값은 더 들겠지만 톨비를 고려하면 더 비용이 적게 들 수 있다. 그러나 오래 걸린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인 부산을 즐기는 시간은 줄어들 수 있다.
이걸 우리 삶의 경로에 빗대어 본다. 아주 심플한 목표 한 두개 정도로 살면 좀 느려도 가는 길도 즐겁게 도착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쉽지 않다. 이렇게 느려서야 원 도착이나 할려나 싶은 생각이 우선 들고, 빨리 부산에 도착해서 회도 먹고 멋진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을 생각을 하며 서두른다. 그래서 다들 서울 경계에서 부터 고속도로를 타려고 한다.
자, 여기서 부터는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고 생각하자. 현실적으로는 국도로 빠지기 전까지도 막히지만 가상으로 고속도로가 몇배 더 막힌다고 치자. 고속도로만 타면 모든게 풀릴거야, 조금만 참으면 돼. 그렇게 고속도로를 선택한 사람이 있는 반면 오늘의 나 처럼 국도로 빠져서 다른 경로로 부산을 가는 사람도 있다. 속도는 느리다. 도로도 좁고 불편하다. 그런데 가는 길에는 소소한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각자 가진 자원이 다르다. 그리고 우연도 닥칠 수 있다. 고속도로를 택할때와 국도를 택했을 때 모두 부산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고, 중간에 뜻밖의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게 최적의 경로인지는 함부로 결론 짓지는 못하겠다.
지금 나는 3번국도를 따라가고 있지만 부산에나 제대로 도착할지 모르겠다. (비유적으로 말이다)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과정 기억과 결과 기억에 대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과정에 대한 기억보다 결과에 대한 기억을 더 잘 기억한다. 그래서 결말에 제대로 터져주는 영화를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착취의 시대’라는 요즘에 여행이 뜰 수 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1년의 고된 노동에 대한 기억은 상대적으로 적게 기억되고 여행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너먼의 얘기를 다르게 생각해보면, 과정의 기억들, 그러니까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갖는다면 그게 더 좋은 기억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결과 기억에서 좋음의 척도가 100인데 소소한 과정 기억의 좋음이 10×15번이이라면 이게 더 나은 게 아닌가도 싶은데, 생각해보면 확실히 결과 기억의 강도가 강하긴 하다. 우리 기억의 매커니즘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미 나는 국도를 따라 가고 있긴 한데, 부산에 닿을지 어떨지는 운에 맡겨야 될 거 같다. 다만 가는 길 동안에 소소한 즐거움을 증폭시키는 전략을 취하려고 한다. 그래야만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그나마 후회가 없을 것 같고 가는 길도 즐거울 것 같다.
이 글도 그에 대한 일종의 의미부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