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를 건다.
“어디야?”
거의 매번 묻는 질문 중에 하나일 것이다. 물론 통화 상대가 어디 있는지 파악한 다음 약속 장소나 시간을 정하기 위해서 “어디야?”라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꼭 목적이 있지않아도 이렇게 묻는다.
“넌 어디 있니? 너 거기 실재로 있긴 한거니? 난 지금 여기 있는데.”
이런 질문 같기도 하다. 서로 같은 장소에 마주보고 대화를 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통화 상대방의 실존(?)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음성은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전파를 타고 전달되다. 상대의 휴대전화에 전달된 디지털신호는 디코드되고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바뀐다. 전달 과정에의 효율을 위해 약간의 잡음과 노이즈가 섞인 발신자의 음성을 상대방이 듣게 된다. 이 과정이 어디에선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실존은 전적으로 발신자나 수신자의 ‘마음’ 속에 있다.
유선전화의 경우는 어떤가? 발신자는 수신자의 위치를 대략 안다. 그 전화번호 자체가 수신자의 위치정보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디야?”라는 질문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유선전화의 수신자는 발신자의 위치를 묻게 될 것이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그의 존재를 어딘가에 두긴 두어야 할테니까.
편지를 쓸땐 어떨까? 이때도 수신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 그리고 ‘나’의 정황을 편지글 앞머리에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창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립니다. 당신이 계신 그곳 하늘에도 여기처럼 하얀 눈이 내리나요?” 등등
편지가 도착하면 상대방은 어쨋건 편지라는 실체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편지 속 사연을 통해 상대방을 머리속에 그린다. 그렇게 발신자의 존재는 ‘마음’ 속 어딘가에 위치잡게 된다.
간혹 통화를 하다가 “어디야?”라는 말이 참 생경스럽게 느껴진곤 했다.
이런 정도 생각을 들어가 봤는데, “어디야?”라는 질문이 나름 나쁘지 않은 출발점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