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어느 선배의 경험담이다. 안양 초등생 살인사건 때의 일인데, 주말에 형사가 방문을 했다고 한다. 형사가 가고나니 무지 기분이 나쁘더란다. 형사의 출현은 언제나 사람을 ‘쫄게‘ 만들긴 하지만 그 이유가 무섭다. 상부에서 관내에 사는 ’30대 후반의 혼자사는 남자‘들을 모두 점검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안양도 아니고 서울 동작동인데 말이다. 안양 초등생 살해 용의자가 ’30대 후반의 혼자사는 남자‘일 것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30대 후반의 혼자사는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다니!?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로서니 그런 모욕을 받아야 하냔 말이다.
강력범죄 중 흉악사범은 30대가 가장 많다고 한다. 흉악사범 중에서 강간사범 또한 30대가 가장 많다. 안양 초등생 살인사건의 범인도 결국 피해자 근처에 혼자 살던 39세의 정모씨였다. 미드에서 익힌 범죄학 상식으로 보자면 연쇄살인범은 30~40대의 백인남성이 주로 지목된다. 이쯤되면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에 대한 불편한 시선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듯도 하다.
어느 20대 청춘은 “난 서른이 되면 죽어버릴거야“라고 외친다. 한두 녀석이 아니다. 30대쯤 되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안다. 그런데 30대가 되어도 죽지 못하고 산다. 세상 폼나게 살겠다고 외쳤지만 한번도 폼났던 적도 없다. 그래도 몇번의 타협을 통해 죽지않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차가 생기고 여자친구가 여러 번 바뀌고 수차례 방을 옮겨다닌다. 남들하듯이 사람같이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니꼽지만’ 계속 일을 한다. 대다수는 결혼에 가까스로 성공하고 몇몇은 실패하거나 회피한다. 결혼한 30대 후반은 또 그렇게 아이가 자랄 때까지 분유벌이와 학원비 벌이를 하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살던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는 40대를 맞이하기 몇 해 전부터 두려워진다. 중년에 접어드는 문턱에 한발을 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청년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상태다. 이거 이러다가 폐지줍는 노인이 되어 혼자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되는건가? 나만 왜 이러고 있지? 제대로 살고 있는건가? 20대의 꿈은 어디로 간 거지? 그런데 답을 찾지 못한다.
여러 압박 속에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여자’들에게 주로 결혼하라는 압박이 가해지는데 비해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는 상대적으로 그것으로부터는 조금 자유로운 편이다. 아직도 결혼 시장에서 연하의 여자가 선호되기 때문에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는 짝짓기 대열에서 완전히 밀려난 건 아닌 셈이다. 안도해야 할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불행이 싹튼다. 짝짓기 시장에서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꽃미남’, ‘몸짱’ 이런 것들이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능력과 재력이다. 그러나 혼자 사는 남자의 현실은 그에 부응하지 못한다.
‘화려한 싱글’ 같은 건 없다. 서울시의 통계를 보면, 1인 가구의 소득 분포에서 상위 20%의 소득은 340만원이다. 다음 20%는 1백 60만원, 하위 20%는 34만원이다. 상위20%나 되어야 우리나라 평균 가계소득 정도 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하자면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고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 혼자 사는 셈이다. 이 통계에는 젊은 층부터 노년층까지 모두 포함된 것이지만 30대를 상위 40%에 모두 있다고 해도 미래를 준비하기엔 빡빡한 금액이다.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 지진희가 맡았던 역할처럼 잘나가는 싱글도 있다. 그러나 극소수다. ‘골드미스’? 소비촉진용 잡지나 광고에서 만들어낸 말일 뿐 싱글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새 길을 내기가 쉽지 않다. 심기일전해서 이전에 하던 일에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려 한다. 경력직에 중간 관리직 쯤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이미 낙오된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회사는 별로 없다. 고민 끝에 인생을 바칠만한 새로운 직업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회사입장에서 보자면 나이 먹은 신입을 기꺼이 받아줄 곳은 많지 않다. 그나마 자유직은 나을 텐데 나이만큼의 실력을 동시에 요구하니 이 또한 쉽지 않다. 우선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어린 것들’의 눈치가 봐야 한다.
30대 후반이라는 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해볼 만큼 해봤고 알만큼 아는 나이다.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업무 능력은 당연히 20대에 비해 월등하다. 다만 대열에서 잠시 밀려난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는 나름대로 쌓아온 것들을 묵혀둘 수 밖에 없는 시기다. 자신을 ‘낙오자’로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 자꾸 쪼그라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도 어렵다. 20대, 30대 초반에 혼자라는 건 오늘밤 새로운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무한 가능성이다. 그러나 30대 후반에 혼자라는 건 계속 혼자 살 것이라는 불안감을 동반한다. 어릴 적엔 그저 콩까지가 씌여 넘어오던 상대여자도 30대가 넘어서면 재력과 능력을 따지기 시작한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그 말 한번 무섭다. 그래, 폼나는 차있는 놈이 집 앞까지 모셔다 주는 게 주변의 시선도 생각해서 좋을테고 편하기도 하겠지. 그렇게 이해한다. 하지만 씁슬하다. ‘30대후반에 혼자사는 남자’ 중에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도 가끔 결혼을 꿈꾸지만 엄청난 결혼 비용 – 1억7천 만원 정도란다. 그 중에 집값이 1억 2천 정도 – 에 꿈도 꾸지 못한다. 그렇게 미적거리다보면 상대는 나이 더 먹어 ‘똥값’되기 전에 시집을 가야겠기에 사랑을 내팽개치고 현실을 택하게 된다. 이렇게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는 생의 동반자 없이 혼자 칙칙한 삶을 살게 된다.
현실과 사람에 치여 더 이상 상처받기 싫은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는 자신만의 성 안에서 자신만의 적응 방식을 찾는다. 가끔 재도약을 꿈꾸며 호기있게 성 밖을 나섰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다 보니 아예 포기하기에 이른다.
나이에 걸맞게 성숙되어 있으나 부딪히는 현실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 괴리감이 생기고 자괴감도 느낀다. 그러한 감정 에너지가 속으로 쌓여간다. 마치 제2의 사춘기라도 온 듯 억제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10대의 사춘기가 외부로의 질풍노도가 아니라 30대 후반의 사춘기는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질풍노도다. 그렇게 내부에 쌓이는 에너지가 잘못 투사되는 경우가 아마도 강력범죄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10대의 사춘기에 정신적, 육체적 성장을 이루듯, ‘30대 후반의 제2의 사춘기는 인생의 흐름에서 큰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에서 가끔 ‘낙오자 여행’이 등장한다. 게임에서 지는 사람 1~2명을 뽑아 따로 더 힘든 여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낙오자 여행’이라 이름 붙여 보자. 무리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낙오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게임은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게임에서 이긴 사람들은 ‘나만 아니면 되!’를 외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낙오자의 고된 여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이제 낙오자는 혼자 힘든 여행길을 나서야 한다.
제주도 캠핑카 여행에서는 김C가 낙오자가 되었다. 신입PD, 카메라맨과 함께 걸어서 숙소로 가야 하는 것이다. 제주도를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주도는 걸어 다녀보면 곳곳이 풍경이다. 밀감 농원에서 잠시나마 밀감 따는 일도 경험해본다. 길을 걸으며 대지에 어둠이 깔리는 과정을 오랜만에 보게 된다. 낙오자의 여행은 승자의 안락한 여행보다 더 큰 기쁨을 선사한다.
‘30대 후반의 혼자 사는 남자’는 낙오자다. 이걸 받아들여도 기분 나쁠 건 없다. 30대 후반의 이 낙오자는 ‘어린 것들’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볼 것 해보고 알건 알만한 나이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때의 발견은 편한 삶을 살고 있는 승자들에 비해 더욱 튼튼한 삶의 기초가 될 것이고 추진력이 될 것이다.
– ‘글’을 쓰기 위해 정리한 어느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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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에는 ‘결혼 못하는 남자‘가 아니라 ‘결혼 안하는 남자‘라고 제목을 붙였어야 맞다. 사회적으로 능력도 인정받고 있고, 재력도 있는, 즉, 짝짓기 경쟁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숫컷이기 때문에 암컷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